[감상평 예제] 부르탈리스트에 대한 감상

『브루탈리스트 The Brutalist (2024)』 감상평

비스타비전 35mm 필름이 빚어낸 빛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간적 사건이었다. 극장의 스크린 위에 펼쳐진 이 영화는 잊혀질 뻔했던 영화관만의 시공간성을 다시금 각인시킨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칫 처질 수 있는 서사의 흐름을 전략적으로 조율한 영리한 판단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그리고 그 판단을 가장 탁월하게 구현한 것은 배우들의 연기였다. 장면마다, 대사마다, 그들은 형식에 봉사하면서도 자신의 인물로 살아 있었다.

3시간 동안 이어진 감각의 압박. ‘고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그 감정은 피로가 아니라 집착에 가까운 몰입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아직 더 할 셈인가?”
그 반복 속에서 영화는 고전이 되었다. 현대적이고, 잔혹하며, 시대의 그림자를 끌어안은 고전. 아, 훌륭한 고전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었다.

한편으로, ‘더 브루탈리스트’에서 연출된 도구로서의 성(性)에 대해 불편함을 표하는 반응이 있었음을 안다. 나 역시 불편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우리는 각자의 경험의 한계를 근거로 도덕적 이상향을 주인공에게 투영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는 그 욕망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등장인물이 겪는 고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폭력’이기에 불편한 것이며, 그 불편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설계가 탁월한 이유다.

예술이 학문과 다른 점은 바로 이러한 불편함조차도 상상력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성, 폭력, 집착, 소유, 욕망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상징 체계로 조직되어 있으며, 단순한 자극이나 포르노그래피로 치부되기에는 그 표현의 형식이 지나치게 정교하다.

라즐로의 자학적 집착은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그는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약에 의존하고, 그 불안은 다시 욕망과 파괴로 귀결된다. 반면 자본가 밴 뷰런은 그 욕망을 소유와 통제의 방식으로 추구한다. 그는 예술을 경외하면서도 그것을 소유하려 하고, 결국 타인의 고통을 착취한다. 그들 사이에 놓인 에르제벳은 공황과 마약에 찌든 남편의 그림자를 끝내 떠안는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는 연민과 사랑이 공존하고 있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체제는 이 인물들의 파국과 고통 위에 배경으로 존재하며, 영화는 그 삶의 해체와 회복 가능성을 짧은 시간 안에 탁월하게 조형해낸다.
공간은 붕괴하고, 인물은 해체되며, 시간은 느릿하게 흐르지만, 그 모든 해체의 과정을 시청각적으로 치밀하게 엮어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영역에 도달해 있다.

그리고 마지막, 감독은 묵직한 한 방을 던진다.


“과정보다는, 우리가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문장은 영화 전체에 깃든 윤리적 질문이기도 하다. 브루탈리즘 건축의 단단함처럼, 이 영화도 형식 안에 윤리와 질문을 봉인한 채 관객에게 던져놓는다. 관객은 그것을 해체하고, 불편해하고, 사유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감정, 이 불편함, 이 집착이야말로 진정한 영화적 체험이라 믿는다.